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안 사건 (문단 편집) === [[만주사변]]과 [[장쉐량]]의 몰락 === [[장쉐량]]은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쭤린]]의 아들로서, 거의 독립왕국이었던 만주와 20만 병력의 동북군을 물려받은 대군벌이었다. 봉천군벌은 1928년까지만 하더라도 국민당 북벌군을 이끄는 [[장제스]]와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봉천군벌의 수장이자 중화민국 북양정부 육해공 대원수인 장쭤린이 [[황고둔 사건|관동군의 음모]]로 사망하고 장제스의 북벌군이 베이징을 점령, 만주를 위협하게 되자 일본과 협력하여 북벌군에 맞서거나, 장제스와 협력하여 내셔널리즘 열풍에 굴복하거나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해야 했다. 일본은 장쉐량을 강하게 압박하여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려 했으나 [[동북역치|장쉐량이 장제스와 손잡는 것을 선택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형식상 동북군이 국민당 산하에 들어가고 장제스가 장쉐량을 국민당 동북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방식이었지만, 어쨌거나 이 때도 봉천군벌의 독립성은 그대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3년 후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군을 분쇄하고 만주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장쉐량이 이끄는 20만 동북군이[* 비정규군과 관내 병력을 합치면 50만에 달했다.] 1~2만에 불과한 관동군에 참패한 것이다. 이는 일본군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장쉐량의 전략적 패착이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장쉐량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장제스는 군사력이 후달려 만주를 군사적으로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만주를 외교적으로 되찾기 위해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물론 당시 국제연맹은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형편없기도 하였고, 일본은 국제연맹 따위는 그냥 씹어버릴 정도로 막나가는 놈들이어서 실패로 돌아갔다.] [[왕징웨이]], [[후한민]], [[쑨커]] 등을 초청하여 초계파적인 국민당 회의를 열어 만주사변에 대응하고자 했는데, 회의장은 금세 만주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을 성토하는 자리로 바뀌었고 장제스와 장쉐량이 공식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후임으로 등장한 쑨커, 왕징웨이 연립내각은 30일을 버티지 못한채 장제스에게 복귀를 요청했다. 사실 혼란스러운 국민당을 힘으로나마 누를 수 있던 것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육성한 [[국민혁명군]], 상하이의 자본가들과 4대 가문이 제공하는 권위와 자금, 청방과 황푸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인맥을 가지고 있던 장제스만이 가능했다. 장제스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그래 내가 부덕하니 난 사퇴, 너희들끼리 잘해보셈."이라면서 사퇴하였고 그러면 후임자들은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여 gg치고 장제스에게 돌아올 것을 간청하기 일쑤였다.[* 이 일로 장제스도 심각하게 빡쳤는지 '''"나를 비판하는 자들은 책임을 질 생각도 안하면서 나를 몰아낼 생각만 한다!"'''라고 일기에 서술했다.] 결국 장쉐량은 1931년 12월 19일에 만주에서 철수하여 남은 영지인 러허에 틀어박히지만 일본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서 러허도 점령해버렸다. 열하성 정부주석 [[탕위린]]은 태업을 일삼다가 개인 재산만 챙겨 적전도주했고 결국 열하도 싱겁게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에 장쉐량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 후 패잔병 10만 명을 이끌고 산해관 안으로 들어와서 산시성 근방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곳은 원래 다른 군벌 양후청이 약 4만명의 서북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